서평
<한국영화사>의 재출간 의미
노만 선생의 <한국영화사>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이 분야에 초석을 깔아놓은 역저(力著)였다. 1963년 간행된 이 저작물은 당시 마땅한 교재가 없는 한국배우전문학원이나 갓 출범한 한양대학교 등 몇 군데 대학의 영화학과 학생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교재였다. 이 책이 나오기 전에는 개략적 총론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박누월의 <조선영화발달사>(영화배우술, 1939, 삼중당, 수록)나 해방 후 《인민평론》(1946년 3월) 지에 게재된 김정혁의 단편적인 「조선영화사」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이 저서는 1962년 월간 《국제영화》 5월호부터 63년 6, 7월 합병호까지 10여 회 동안 연재한 <한국영화사>를 중심으로, 여기에 《사상계》(1962년 5월호)에 게재된 “저항 속에 싹터온 한국영화”를 추가, 보완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안종화의 <한국영화측면비사>(1963)가 출간되기 전이었다. 제1장 ‘활동사진의 수입’에서 ‘영화의 해방’까지 8개 항목으로 구성된 <한국영화사>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결실이었다.
이는 그가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다니며 학사 논문으로 '시나리오 문학론'을 쓰고, 이 시기에 단편소설 <소년 차장>을 집필한 문학도로서의 열정과 1957년 이후 월간 《스크린》 편집장 등을 지내며 절감했을 기록의 중요성과 역사적 인식이 일구어낸 값진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철필로 써서 만든 이 등사본 <한국영화사>가 거의 60년 만에, 그것도 저자가 90세를 바라보는 시점에 영인본이 아닌 어엿한 인쇄본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이는 역사기술에 대한 열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1960년 서울 명동에서 한국영화평론가협회를 만들며 교분을 쌓고 같은 길을 걸어온 후배로써 감회가 깊지 않을 수 없다. 어려운 여건 아래서도 영화의 역사를 연구하는 후학들에게도 자극을 주고 분발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영화평론가 김종원)
서 장 영화의 발명
제1장 활동사진의 수입(輸入)
제1절 사진기(寫眞機)의 도래
제2절 환등(幻燈) 공개
제3절 활동사진의 수입(輸入) 공개
제2장 초창기
제4절 초기의 영화제작
제5절 동아문화협회(東亞文化協會)의 창립
제6절 단성사(團成社) 영화제작부의 설치
제7절 조선(朝鮮)키네마 주식회사의 발족
제8절 초기의 영화흥행
제9절 초창기의 개관(槪觀)
제3장 과도기
제10절 백남(白南) 프로덕션과 고려키네마
제11절 프로덕션의 난립과 고려영화제작소
제12절 당시의 극장사업
제4장 영화예술의 발아기
제13절 나운규(羅雲奎)와 「아리랑」
제14절 조선키네마와 나운규(羅雲奎)의 독무대
제15절 이경손(李慶孫)과 영화예술협회
제16절 토성회(土星會)와 이규설(李圭卨)
제17절 신인(新人)들의 진출
제18절 계림영화협회(鷄林映畵協會)의 재출발
제19절 영화제작의 중단
제20절 나운규(羅雲奎) 시대
제21절 경향파(傾向派) 영화인의 등장과 조선영화예술협회
제22절 저급(低級) 작품의 제작과 금강(金剛)키네마 창립
제23절 오락영화의 성행
제24절 영화의 위기와 이경손(李慶孫)의 전향
제25절 영화의 검열
제26절 외화 공세(攻勢)와 토오키의 대두
제5장 무성영화의 전성기
제6장 토오키시대
제7장 한국영화의 운명
제8장 영화의 해방
・ 활동사진 「필름」 검열규칙
・ 스틸로 보는 그때 그시절 현장 이모저모
1954년 서울고등학교 졸업
1958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학과 졸업
1959년 영화예술 편집장
1962년 한양대학교 영화학과 강사
1963년 한국 배우전문학원 강사
1969년 칠성영화주식회사 대표
저서
다시보고싶은영화 _1959
세계배우70인 _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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